목차:케네디의 안경 사라토가(by 아메리칸 옵티컬)
1부)1부링크
1.오리지날 사라토가 모델의 출시 시기
1-1)1950년대의 사라토가 모델은 제품 코드로만 불렸다.
2.사라토가란 모델명의 시작
3.사라토가란 모델명의 유래
2부)
4.케네디와 사라토가란 이름의 관계?!
5.사라토가란 이름에 숨겨진 비화
6."사라토가"에 얽힌 4가지 루머
1)부족한 빈티지 안경에 대한 지식?!이 루머의 원인?
2)1950년대 안경 디자이너란?
3) "Raymond Stegeman"은 정말 AO에서 근무 했을까?
4. 케네디와 사라토가란 이름의 관계?!
케네디의 사망 이후 약 1년이란 시간이 지난 1965년 별도의 모델명이 생겼으니,
사라토가란 이름과 케네디와의 연관성은 지나친 억측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형 안경 회사에선 이미 1년 전에 차년에 발매될 제품들의 발매 일정이나
디테일들이 확정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은 그의 사망 이후 바로 준비되었다 볼 수 있고,
케네디에 대한 추모의 의도와 함께, 인지도가 높아진 제품의 마케팅을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1) 케네디와 AO, 오랫동안 이어진 관계
대통령이 애용하던 안경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추모하며 제품명을
별도로 만들었다기엔 그 연결성이 너무 약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AO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고, 대통령이 되기 이전,
47~59년까지 매사추세츠 상하원 의원직을 지냈습니다.
매사추세츠는 케네디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광학 회사로서, 미국에서 가장 큰 공장을
매사추세츠 사우스브리지에서 운영하던 아메리칸 옵티컬과는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관계를 쌓아 왔습니다.
실제로 그와 그의 자녀들의 안경을 AO를 통해 주문하여
사용하였고, 이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다양한 편지로 남아있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케네디로 인해 높아진 제품 인지도를 위한 마케팅적인 측면
또한 굳이 그와의 관계성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CN-25 모델은 케네디의 사망 이후 국제적인 추모 열기 속에
더 부각되며 인지도가 국제적으로 급격하게 상승하였습니다.
이렇듯 국제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는 모델이었지만,
영어와 숫자로 이뤄져 부르기 어려운 제품코드만 가지고 있다 보다,
쉽고 간단한, 고유의 이름을 갖는 것은 마케팅적으로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5. "사라토가"란 이름에 숨겨진 비화
"사라토가" 라는 이름엔 케네디와 관련된 숨겨진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케네디의 셋째 아들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7월 16일,
로리 케네디(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처형과 함께 단발 엔진 경비행기를 직접 조종하여
매사추세츠주 마서스 비니어드로 향하다 추락사하게 됩니다.
그의 죽음으로 존 f. 케네디 가문의 직계 혈통은 끊어지게 됩니다.
사고 당시, 케네디 주니어가 몰았던 비행기의 이름이 사라토가(PA-32R)였습니다.
케네디를 추모하며 만들어진 "사라토가"라는 이름은
결국 그의 가문을 추도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6."사라토가"에 얽힌 루머
케네디 대통령이 착용했던 선글라스가 레이밴의 웨이페어러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 사라토가에 얽힌 가장 유명한 루머였습니다.
하지만, 유독 국내에서만"사라토가" 모델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루머가 몇 가지 더 돌고 있습니다.
-----
루머)아메리칸 옵티컬의 전 디자이너가 대우에 불만을 품고 바슈&롬으로 넘어가
웨이페어러를 디자인해서 후에 아메리칸 옵티컬에서 땅을 치며 후회를 하다
뒤늦게 웨이페어러 카피 모델을 만든 게 사라토가다.
위와 같은 내용이,"빈티지 전문가 만이 알 수 있는?
숨겨진 재미난 비화"라며 돌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허위 사실입니다.
-----
지금의 루머는 얕고 좁게 알고 있던 빈티지 지식에, 상상의 나래를 더한 결과로,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오해와 억측이 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1)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생긴 루머
위키피디아 등에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 웨이페어러의 역사를 보면
American optical designer "Raymond Stegeman"
미국인 광학 디자이너 "레이몬드 스테그먼"
이 웨이페어러를 디자인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미국인 광학 디자이너 << >>아메리칸 옵티컬의 디자이너로 둔갑되었습니다.
(영어대문자표기 원칙에 따라 일반적으로 인종, 국적, 언어는 대문자로 표기)
6-2) 1950년대 안경 디자이너란?
결국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생긴 대 참사로 볼 수 있겠지만, 이런 오해의
바탕엔 과거 안경 산업에 대한 몰이해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50년대 초 아메리칸 옵티컬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프레임 스튜디오"란
아이웨어 디자인 팀과, 팀에 합류하게 된 이들이 맡게 된
"프레임 디자이너"란 직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광학 디자이너(Optical designer)란 직군이 검안도구를
포함한 안과용 도구와 안경을 같이 디자인하였습니다.
현대엔 중요 직군으로 분류되는 아이웨어 디자이너가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기에,
광학 디자이너란 포괄적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American optical designer "Raymond Stegeman"
> 미국인 광학 디자이너 "레이몬드 스테이그먼"이 아니라
아메리칸 옵티컬의 디자이너 "레이몬드 스테이그먼"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여기에 살이 더 붙어 지금의 루머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3) "Raymond Stegeman"의 근무 이력?!
혹시나 그래도 연관성이 있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을 수 있어 쐐기를 박자면,
웨이페어러는 1952년 디자인 특허 등록 신청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해당
디자인이 등록 신청되기 11년 전인 1941년부터 "바슈&롬"과 "레이먼드 스테그먼"의
이름이 공동으로 등록된 검안 도구 디자인 특허를 10건 이상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스테이그먼과 바슈롬의 특허 등록 및 소유권에 대한 내역은 이후 총 70건 확인됨)
이 특허 등록 내역들을 보면 레이먼드 스테그먼은 웨이페어러의 디자인이
등록 신청 되기 최소 11년 전인 1941년부터 바슈&롬에서 일을 해왔고,
(검안도구/광학도구에 대한 등록이 99.9% 정도로 대부분을 차지)
왜 "아이웨어 디자이너"가 아닌 "광학 디자이너"란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총 4부작으로 구성된 존 F. 케네디의 안경
사라토가 리뷰 글은 다음 3부로 이어집니다.